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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V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4. 00:14


    로마인들은 막대한 인력과 자원 덕분에 한니발을 저지할 수 있었고, 배반했던 도시들을 재정복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지 않는 한 이탈리아의 동맹국들과 자신의 군대를 보호할 길이 없었다.

    그는 로마가 자신의 새로운 동맹국들을 하나씩 재정복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1년에 카푸아가 함락됨으로써 캄파니아 전역이 로마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Sacking of Capua






    Capua




    카푸아가 함락되기 1년 전에 시라쿠사이가 유명한 로마장군 마르켈루스의 포위공격에 함락되었다.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이에 해군을 지원하는 미미한 시도 이외에 효과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시라쿠사이는 함락된 뒤 약탈당하여 영원히 독립을 상실했다. 기원전 210년 아그리젠툼이 함락된 후 시칠리아 전역이 다시 한 번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Marcus Claudius Marcellus(BC 268– BC 208)





    제 1 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 205)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동맹을 체결한 후 그리스와 발칸반도에서 로마에 대행해 두번째 전선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기원전 214년 일리리아에 있는 보마의 보호령과 해군기지들을 공격했고, 카르타고 함대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한니발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카르타고 함대 대신 50척으로 구성된 로마 소함대가 왔고, 로마인들은 해군기지와 기존의 보호령 일부를 쉽게 탈환했다.

    로마인들은 필리포스가 계획하고 있던 이탈리아 본토 침공을 막기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 및 그밖의 그리스 국가들과 공세적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반 마케도니아 연합을 결성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연합을 분쇄하기 위해 네 차례의 탁월한 원정을 감행했으나 그리스 전쟁은 필리포스를 그리스에 묶어 두어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로마의 목적에 일조했다.




    Philip V of Macedon


    히스파니아 전쟁(기원전 218~207)



    한니발이 전쟁 1회전에서 패배한 곳은 히스파니아였다.

    적장은 기원전 218년의 콘술 푸블리우스 코리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그는 비록 훌륭한 전략가는 아니었지만 한니발의 로마 제패 전략의 의미를 이해했다.

    한니발이 론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그는 혀제 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냈고, 자신도 트레비아에서 패배한 후 그곳으로 합류하였다.

    이 히스파니아 원정의 목적은 한니발에게서 주요 거점과 인력 및 물자의 근원을 박탈하고 한니발의 형제 하스드루발이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Roman army



    기원전 215년 두 명의 스키피오가 이베르 강 유역 이베라 근처에서 하스드루발과 대치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사용한 전술을 펼쳤으나 중앙이 너무 허술하여 중앙을 돌파당함으로써 전투에서 패했다.

    두 동강이 난 그의 군대는 쉽게 궤멸되었고, 스키피오 형제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기원전 211년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하스드루발이 패배한 뒤 히스파니아의 여러 종족들이 로마인들에게로 넘어갔지만,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의 시팍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돌아간 뒤 스키피오 형제는 비로소 동맹을 맺은 히스파니아 종족들이 얼마나 신의가 없는지 깨닫게 된다.

    기원전 211년 많은 히스파니아인들이 탈영하자 로마 군대는 패배했고, 스키피오 형제는 전사했다.

    빈약한 전력으로 로마의 최종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스키피오 형제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THE BATTLE IN THE RIVER, NEAR SAGUNTUM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전사한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조카로 티키누스강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출했던 미래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었다.

    참패를 겪은 후에 그는 로매 패잔병들에게 계속 싸우도록 독려했다.

    그는 기원전 210년 히스파니아에서 전사한 뒤, 히스파니아의 로마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높은 관직이었던 것도 아니고 사인私人이었음에도 명령권과 콘술 대행의 지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스키피오는 수준 높은 그리스 교육을 받았고, 대다수 로마 귀족보다 개인주의적이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패배한 적군 병사들에게 이례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지만, 아울러 비양심적이고 기만적이기도 했다.

    그는 장군으로서 용기와 지략과 자신감과 부하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제 단도를 히스파니아제 장창으로 교체했는데, 끝을 강철로 제련한 이 장창은 찌르는 것 뿐 아니라 베는데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의 기존 밀집 대형을 포기했다. 기존의 로마 군단은 3열 횡대로 배치되고, 각 횡대는 10개 중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무거운 대형은 전진할 때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지만 회전이나 방향전환이 힘들고, 칸나이 전투에서처럼 측면공격에 취약했다.

    또한 전체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 소규모 단위 병력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대형을 선택했다. 이런 혁신적인 전술을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강도 높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군대를 훈련시킨 뒤 기원전 209년 적군의 영토로 과감히 진군하여 카르타고 노바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카르타고 노바의 함락은 스키피오에게 우수한 기지, 은광, 선박, 엄청난 전리품, 돈, 무기, 1만명의 히스파이아 인질들을 안겨주었다.

    그는 인질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준 뒤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히스파니아인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Hasdrubal Barca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08년에 스키피오에게 패한 뒤 자신의 군대를 거의 다 이끌고 후퇴하여 이탈리아의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장정에 올랐다.

    하스드루발이 떠나자 스키피오로서는 카르타고의 다른 점령지들을 공략하기가 훨씬 쉬워졌고, 기원전 207년 일리파 전투를 끝으로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주둔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의 군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면 로마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좋은 거점인 브루티움을 잃을것이 두려워 북 이탈리아의 동생과 합류하려 하지 않았고

    더욱이 하스드루발이 형에게 움브리아로 진군하여 로마 근처에서 만나자고 요청한 서한이 로마군의 손에 들어갔다.


    소재를 파악하게 된 로마의 군단이 북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콘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소수의 병력을 뒤에 남겨 한니발을 감시하도록 하고 조용히 진군하여 엿새 뒤에 메타우루스 강에 도착했다.

    하스드루발은 서둘러 강을 건너 퇴각하려 했으나 그의 탁월한 부대는 섬멸되었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built by consul Gaius Claudius Nero in 206 BC, after he had defeated the Carthagian army in the Battle of the Metaurus






    며칠 후 잘린 하스드루발의 목이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져졌다.

    한니발은 그제서야 자신이 전쟁에 패했음을 깨닫고 브루티움으로 철수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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