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II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1. 16:56


    지연자 Cunctator 파비우스 막시무스(기원전 217)



    트라시메네의 패배, 포위에 대한 두려움, 매일 열리는 원로원 회의, 시민들의 우상 플라미니우스의 전사

    그의 파벌의 몰락,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의 재기, 이 모든 상황이 30년간 사장되어있던  독재관의 부활과

    이상하고 수수께끼같은 극단적 보수주의자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라는 인물의 등장을 야기시켰다.









    파비우스는 독창적이긴 했지만 다소 소극적인 전략을 채택한다.

    로마 기병대가 한니발의 기병대에 비해 열세라는 판단하에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상대의 소모와 고갈에 입각한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Quintus Fabius Maximus Cunctator gaat te voet zijn zoon tegemoet, David Vinckboons, 1604 - 1613





    이 전략은 한니발이 부주의하게 스스로 불리한 여건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될 때까지 불리한 전투는 일절 삼가하고

    자신의 군대를 항상 산지에 주둔시켜 한니발로 하여금 기병대를 활용할 수 없게 만들고 후미를 괴롭히고, 행보를 방해하고,

    동맹세력 확보, 식량조달, 기지 구축들 가로막음으로써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의 사기를 꺾는 전략으로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원정을 감행한 진짜 목적 - 로마 동맹 붕괴 - 을 달성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비우스의 이 조심스러운 전략은 오늘날까지 '파비우스식fabian'으로 불리우며 이 전략으로 그는 당시 지연자Cunctator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로마인 모두가 이 전략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켄투리아회에서 기병대장으로 임명한 저돌적인 미누키우스 루푸스Minucius Rufus 는

    이 전술을 혐오했다. 게다가 지연술은 적군뿐 아니라 사용자 측에도 부담을 주는 법이다.

    기원전 217년 미누키우스는 신임 콘술을 선출하기 위해 모인 민회에 나타나 로마는 아직 총력을 집중하여 한니발과 싸워보지 못했다고 선언하면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낼사람을 콘솔로 선출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시민들은 새로운 콘솔로 선출된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하루 빨리 한니발을 제거해 주기를 기대했다.






    Minucius Rufus





    칸나이 전투(기원전 216)



    두 콘술은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니발을 제거하기 위해 아풀리아의 칸나이 근처에 도착했다.

    칸나이는 작은 요새지만 아우피두스 강 근처의 중요한 군수 물자 기지였다.

    그들은 3열 횡대로 평소보다 밀집된 대형을 갖추고 보병을 한복판에 배치했다.

    파울루스의 지휘하에 오른쪽에 배치된 기병은 보병과 강 사이에, 바로 지휘하의 기병은 왼쪽 개활지에 배치되었다. 








    한니발은 양쪽의 기병만 로마군대와 똑같이 배치하고, 중앙의 대형을 갈리아인과 히스파니아인들로 구성된 중앙 대형의

    뒤쪽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중무장 아프리카 병사들을 사다리꼴로 배치했다.




    The Battle of Cannae in 216 BC (gouache on paper) Severino Baraldi





    로마 보병이 한니발의 전열을 향해 진격했다.

    전면에 배치된 한니발의 병력은 한동안 완강히 버티더니 로마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빠졌다. 하지만 서서히 물러나는 한니발의 군대를 따라

    깊숙히 들어갈수록 양쪽에 버티고 있던 한니발의 아프리카 병력이 로마군을 더욱 좁게 에워쌌다.



    보병전과 동시에 기병전도 진행되었다. 왼쪽 날개에 배치되었던 한니발의 기병이 오른쪽 날개에 배치된 로마 기병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렸다.

    로마 기병은 군단들과 강 사이의 협소한 공간때문에 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로마의 오른쪽 기병을 무찌른 한니발의 기병들은 한 바퀴 돌아 교전중이던 바로의 왼쪽 기병을 공격, 전멸시켰다.

    로마의 양쪽 기병이 제거되자 카르타고 기병들은 마음놓고 후미를 공격할 수 있었다.

    로마 보병들은 이미 적진 중앙으로 너무 깊숙히 들어간 나머지 더 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꽉 죄였다.

    수만 많았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병사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대학살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나자 콘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 약 7만 명의 로마인들이 시체가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The Death of Aemilius Paullus by John Trumbull, 1773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거둔 승리는 전술의 고전적인 모범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그 승리는 병력의 파격적 배치뿐 아니라 시간 조절과 협력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며 방어 준비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로마 침략 가능성보다 심각한 것은 한니발이 애초에 세웠던 로마동맹 와해라는 목표를 거의 다 성취했다는 사실이었다.

    동맹국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충성심이 흔들렸다.

    아풀리아의 여러 읍들과 루카니아 브루티움의 여러 도시들이 한니발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캄파니아의 카푸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가 반란을 일으킨 뒤 한니발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로마가 일리리아에 세워둔 교두보로부터 로마인들을 쫓아내고 싶어하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215년에 한니발과 상호 지원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이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인들은 다시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채택하고, 전투를 회피하는 전술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니발에게 군수 물자를 조달하거나 카르타고로부터 보급 물자를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들을 로마로 되돌리는 일에 주력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