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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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공화정 - 평민들이 거둔 승리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18. 18:57
기원전 445년 경 두가지 사안이 귀족들과 투쟁하던 평민들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하나는 군사적 위기로써, 귀족들이 정확하게 이해한 것처럼 평민들의 선의와 협력이 없이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두번째는 그 해의 콘술이 평민인 마르쿠스 게누키우스M.Genucius 였다는 점이다. 신분 갈등에서 도출된 타협안은 평민이 콘술이 아니면서 콘술과 동일한 권한을 가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최고 정무관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교묘한 귀족의 전략이었는데, 귀족직의 콘술 직 장악을 보장하는 동시에 평민에게 정부 안에 한 몫을 내어 줌으로써 군사적 통일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c. 387 BC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참가했던 Battle of the Allia 트리부누스 밀리툼에게 콘술의 권한을 부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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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초기의 신분 투쟁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8. 17:08
연대기 전승에 의해 조성된 허구 중에 하나는 타르퀴니우스 왕가가 몰락한 뒤 소수 귀족들이 국가를 절대적이고 배타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티움에서 전쟁과 봉기가 일어났고,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기고 간 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사비니인과 볼스키인이 이동해 옴으로써 내부불안과 혼동이 빚어지던 상황에서 귀족들이 평민 계층 가운데 부유하고 세력있는 일부 가문들의 지원과 협력과 동조를 받지 않고 정부를 장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초기 콘술들의 이름이 적힌 파스티에 평민들의 이름이 더러 포함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ROMAN PLEBEIANS 로마 평민의 모습 권력의 기반이 닦이고 왕정 복고의 위험이 없어져 더이상 평민층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게된 귀족들은 관직 독점을 제도화하고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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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제도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1. 08:55
콘술 이양 시점보다 더욱 쟁점이 되는 것이 콘술 권력의 성격이다. 학자들 중 더러는 독재관 직이었다고 추정하고, 더러는 프라이토르제triple praetorship 였다고 추정하며, 더러는 초보적 형태의 프라이토르 - 콘술제였다고 추정한다. Gold piece showing a Roman magistrate with two lictors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은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콘술직으로 알려져 있었다. 콘술직에는 과거에 왕이 지닌 명령권imperium이 부여되었다. 이 직위는 일년 임기로 선출된 두 사람이 공동으로 차지했다.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각 사람은 상대를 거부할 완전한 권한을 지녔다. 콘술은 군 통수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켄투리아 회를 소집했고, 그 민회에 입법안을 제출했다. 콘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