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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 - 왕들의 업적 Vll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17. 18:07


    제 7대 왕 Lucius Tarquinius Superbus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Ital:Lucio TarquinioTarquinio il Superbo (535 B.C. – 496 B.C.)
    재위기간 : 578 a.C. - 539 a.C.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Tullia 와 결혼 했으나 사별하고, 그녀의 동생 Tullia (동명) 와 재혼했다.
    후처와 함께 장인을 살해려는 음모를 성공시켜 왕위를 계승한다.[1]


    마지막 왕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고대 로마 전설에서 악역을 맡고있다.
    주로 타르퀴니우스의 악행에 중점을 두는 로마사가들에 의하면
    • 언니인 툴리아와 결혼한 후 그녀의 동생과 재혼하기 위해 전처를 살해하고(동생 툴리아는 같은 목적으로 남편을 살해했다),
      권력에 눈이 먼 두 사람은 최악의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다.

      44년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거쳐 이미 노쇠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겨냥한 두 사람의 음모 또한 매우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타르퀴니우스는 황제복을 입고 원로원에 등장하여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5 대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왕위를 탈취했다고 비난한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왕의 격노한 반응은 그를 계단 밑으로 밀어던질 빌미를 주게 되었고,
      부상 당한 왕은 치료를 위해 Esquilino 로 향한다.


      마차 한 대가 따라와 충돌했고, 왕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마차는 왕의 작은 딸 툴리아가 모는 것이었다.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왕위를 차지했다.


      그의 폭정으로 인해 로마왕정이 막을 내리게 된다.
      타르퀴니우스는 유능한 사령관이었으나, 그의 군사적 능력은 속임수에 의한 경우가 많았는데, 어쩌면 이 또한 그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로마제국 역사가들의 의지로 왜곡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 또한 정치 내적 요소, 귀족과 평민들의 불만 같은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 없이 그를 악행을 일삼는 폭군, 잔인한 왕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데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설득력이 있다.

          *  카피톨리노 언덕의 쥬피터 신전 완성을 위해 로마 평민계급 plebe 을 노예화한 것
          *  원로원을 무력화하고 자신에게 절대 권력을 집중시킨 것








    쥬피터 신전


    그의 이런 행동들은 외교와 군사적인 성공까지도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노예계급으로 전락한 평민들에게서도, 정부의 결정으로 부터 소외된 부자들에게서도 그는 정치적 동의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몇 군사적 성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된다. 캄파냐 주와 남쪽을 연결하는 상업용 도로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라틴 도시들을 정복했고, 결과적으로 로마의 확장에 기여했으며,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 간의 교역을 위해 육로를 통합하기 위해 행해진 군사 정책들은 비록 야만적이었지만
    선대 왕들과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투스컬룸과 안티움, 볼쉬, 에르니치, 에퀴와의 동맹같은 외교 정책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라찌오 주 남부에서 로마세를 견고하게 할 수 있었다.
    상업용 도로를 강화하기 위해 치르체이와 시니아를 식민지로 삼은 것 역시 선대왕들의 정책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국민들, 하다못해 자신이 속한 타르퀴니우스 가문과의 합의조차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외부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로마 내부에는 중압만 가했다.

    그가 아르데아라는 라틴족의 도시를 공격하고 있을 때 로마가 폭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타르퀴니우스 가문의 루시우스 브루투스가 민중저항을 주도했다.
    로마의 모든 성문이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를 향해 닫힌다.


    타르퀴니우스의 몰락에 관해서는 두가지 다른 버전이 있다:
    첫번째는 로마가 포르센나에게 포위만 되었다는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로서 로마가 포르센나에 정복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와 전설은 로마 왕정의 최후를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

    전설에 의하면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 아르데아 포위전 도중에 로마로 돌아와 휘하 장군의 아내를 성폭행했는데,
    루크레치아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건을 고백하고 자살했다.
    이미 폭정에 지쳐있던 로마 민중은 분노했고, 브루투스가 나서서 왕을 로마로 부터 차단한다.
    로마를 오래동안 공격하고 있던 포르센나 또한 본거지를 로마 영웅들에게 타격을 입게 되어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게된다.
    타르퀴니우스는 투스쿨룸에서 그리스 식민지 쿠마로 옮겨가 망명생활을 했다.




    쫓겨나는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두 번 째는 기록과 가능성에 따라 재구성한 것으로, 키우시의 에트루리아 왕에게 로마가 점령당했다는 것이다.
    승전한 포르센나가 타르퀴니우스를 로마에서 축출했다는 것인데, 이 경우 평화협정은 항복 협정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가정은 타르퀴니우스가 처음에는 투스쿨룸, 이후에는 쿠마로 망명한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만약 포르센나의 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었다면 남쪽의 그리스가 아니라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들 중에 하나로 망명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의 남방진출은 기원전 506년 아리치아 전투에서 라틴족과 쿠마 연맹에 의해 저지된다.
    이 사실은 라찌오 주에서 에트루리아의 패권을 약화시킨다.)

    에트루리아왕들의 지배하에서 2진으로 밀려나있던 로마 귀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민중을 자극한다.
    에트루리아 지배에서 벗어난 로마는 도시를 방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군주제를 포기한다.


    전설은 로마가 포르센나에게 패배했던 사실을 은폐하려는 리비우스와 타치투스같은 로마제국 역사가들의 기록을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타르퀴니우스 왕가가 지배하는 동안 로마는 모든 면에서 에트루리아화 되었지만
    에트루리아 도시들 간의 전쟁도 끊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포르센나가 로마를 정복한 것도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잔인한 폭군 - 오만왕 타르퀴니우스의 이미지는 로마인들의 옛 기록에서 비롯되는데,
    그의 재위기간 중에 보인 야만성은 그의 선대 왕들이나 그의 후대 독재자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출처> [1] 위키백과
              
    [2]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3]http://www.romaspq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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